주제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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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류중영선생 동갑 계원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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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柳仲? ?山 彦遇 1 / 12 公綽

류중영(柳仲?) 1515(중종 10)∼1573(선조 6).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 류소(柳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자온(柳子溫)이고, 아버지는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이며, 어머니는 증 이조참의 이형례(李亨禮)의 딸이다. 선조 때의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의 아버지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성균교수(知成均敎授)가 되었다. 이어 황주·상주·양주·안동의 훈도(訓導)를 역임하면서 지방교육에 큰 힘을 기울였다. 1546년(명종 1)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박사가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1549년에 전적(典籍)·감찰·공조좌랑을 거쳐, 1553년에는 장령(掌令)·사복시정·사간·장악원정이 되었다. 이듬해 의주목사로 나가 국경지방의 밀수행위를 조절하고 생산을 권장하여 크게 치적이 있었다. 1564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가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등 선정으로 알려졌다.

1560년에 정주목사로 부임해서도 교육의 진흥과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1572년(선조 5)에 승지를 거쳐 예조참의·경연관 등을 역임하였다. 천성이 충신(忠信)스러우며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고 대소공사에는 힘을 다하며 명예와 지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저서로는 『입암집(立巖集)』이 있다.

 

 

 

 

2 金壽鳳 豊山 而瑞 1 / 22 福景

김수봉(金壽鳳) 1515년(중종 1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서(而瑞)

아버지는 장사랑 김복경(金福景) 생부는 어모장군 부사과 김명경(金命景)

명종(明宗) 13년(1558) 진사시 합격

의금부 도사 역임

 

 

3 金明彦 嘉興 士美 2 / 16 元振

김명언(金明彦) 1515년(중종 10)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미(士美).

1537년(중종 32)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며,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尹元衡)일파가 국정을 장악하자 호조정랑으로 있었는데, 집안이 한미하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받고 개체(改遞 : 교체됨)되었다.

그뒤 1553년(명종 8)에는 김제군수로 나갔고, 이후 상주목사 등 외직을 전전하였다. 그러나 수령으로서 바른 정사를 펴서 서리와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높았으며, 특히 청렴결백하여 윤원형일파가 제거된 뒤 명종이 문신들을 시험하면서 청백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추대하였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4 金懿胤 光山 大叔 2 / 17 克福

김의윤(金懿胤) 1515년(중종 10)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대숙(大叔)

조부는 좌리공신 좌참찬 김겸광(謙光) 아버지는 좌찬성 김극핍(金克?)

백부는 좌의정 광산부원군김 국광(金國光)

중종(中宗) 38년(1543) 생원시 합격 명종(明宗) 8년(1553) 문과급제

명종 11년 호조정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역임

 

 

5 朴大齡 高靈 眉之 2 / 18 永漢

박대령(朴大齡) 1515년(중종 10)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미지(眉之)

아버지는 안음 현감 박영한(朴永漢)

별제(別提)로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에 합격 했다.

 

 

6 趙舜賓 平壤 叔獻 3 / 13 晟

조순빈(趙舜賓) 1515년(중종 10)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숙헌(叔獻)

아버지는 교관 조성(趙晟) 외조부는 찬성(贊成) 박열(朴說)

현감(縣監)을 지냈다.

 

 

 

7 金仁慶 光山 景裕 4 / 7 憲胤

김인경(金仁慶) 1515년(중종 10)~ 1583(선조 1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유(景裕). 아버지는 호조참의 헌윤(憲胤)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동지중추부사 안세(安世)의 딸이다.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1522년(중종 17)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1527년 기묘사화 때 피해자인 사림파의 김안로(金安老)가 기묘사화의 주동자였던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며 중종의 맏사위인 희(禧)를 사주하여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처음 누구의 처사인지 모르다가, 결국 무격을 좋아하였던 그의 장모 혜빈 박씨(惠嬪朴氏)가 용의자로 지목을 받아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와 함께 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이때 그도 연좌되어 상주로 장배(杖配)되었고, 1533년에는 부인 혜순옹주마저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앞과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경빈 박씨가 사사(賜死)된 뒤 서인으로 폐출된 부인과 함께 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공주로 양이(量移)되었다.

그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가 아주 심하였던 김안로가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된 뒤 혐의가 풀려 1537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 뒤 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종실과 부마들만이 모여 벌인 백일장에서 장원, 통헌대부(通憲大夫)에 가자되었다.

 

 

 

8 尹河 茂松 大紀 3 / 13 瑞孫

 

 

9 盧守愼 光山 寡悔 4 / 16 鴻

노수신(盧守愼) 1515(중종 10)∼1590(선조 23).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숭 (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홍(鴻)이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 하였고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10 洪以坤 南陽 仲順 5 / 9 潤元

홍이곤(洪以坤) 1515(중종 10)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순(仲順)

아버지는 강음 현감 윤선(潤先) 외조부는 감찰 지성(智成)

문과에 급제 하지 못하자 무과에 급제 제령(載寧) 수안(遂安) 고양(高陽) 정선(旌善)안산(安山) 상원(祥原) 등 여섯 고을의 군수를 역임하고 한성 서윤을 지냈다.

묘갈명은 율곡 이이가 지었다.

 

 

 

11 尹先哲 坡平 仲晦 5 / 11 倬

윤선철(尹先哲) 1515(중종 10)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회(仲晦)

아버지는 한성좌윤을 지낸 평와(平窩) 윤탁(尹倬)

조부 윤사은(尹師殷) 아버지 윤탁(尹倬)과 본인까지 3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 했다.

명종(明宗) 10년(1555) 문과에 급제 형조 정랑을 역임 했다.

 

 

12 閔思容 驪興 彦? 5 / 11 齋仁

민사용(閔思容) 1515(중종 10)~1579(선조 1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묵(彦?)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입암 민제인이고 5대손이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이다.

관직은 음서로 문천군수를 지냈다.

묘갈명은 도암 이제가 지었다.

 

 

13 趙應? 林川 季享 5 / 12 翊

조응침(趙應?) 1515(중종 10)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계형(季享)

아버지는 군자감 정 조익(趙翊)이고 외조부는 대사헌(大司憲) 민휘(閔暉)

관직은 선전관을 지냈다.

정사룡이 지은 조익의 묘갈명에 장남인 조응겸(趙應謙)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고, 둘째인 조응순(趙應純)은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이고, 셋째인 조응공(趙應恭)은 형조 좌랑(刑曹佐郞)이고, 넷째인 조응침(趙應?)은 선전관(宣傳官)이고, 막내인 조응관(趙應寬)은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성취하지 못한 채로 요절하였다

 

 

 

14 金? 安東 漑之 5 / 23 公望

김이(金?) 1515(중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개지(漑之)

아버지는 해주목사 김공망(金公望) 외조부는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 이복형(復亨)

송인이 지은 묘갈명에 의하면 문음으로 선공감 봉사. 종부시 주부. 사헌부 감찰, 당진 현감, 현풍현감. 장예원 사평등을 지냈다. 참고 掌?院司評金君墓碣銘

 

 

 

15 李友閔 延安 孝叔 9 / 5 國柱

이우민(李友閔) 1515(중종 10)~1574(선조 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숙(孝叔), 호는 수졸재(守拙齋). 이숙황(李叔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형례(李亨禮)이고, 아버지는 이국주(李國柱)이며, 어머니는 민침(閔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박사·부수찬·수찬·응교·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성균관사예·사간원정언, 승정원의 우부승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경상도·황해도·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16 梁喜 南原 懼而 10/ 13 應鯤

양희(梁喜) 1515(중종 10)∼1581(선조 14).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구이(懼而), 호는 구졸암(九拙菴). 양천지(梁川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양관(梁灌)이고, 아버지는 첨정(僉正) 양응곤(梁應?)이며, 어머니는 검열(檢閱) 강문회(姜文會)의 딸이다.

노정(盧禎)·이후백(李後白)과 함께 도의와 학문을 닦아 영남의 삼걸(三傑)이라 일컬어졌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 등을 지내고, 1568년(선조 1)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파주목사·사간·의주목사·승지를 거쳐, 1580년에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1581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옥하의 객관에서 병사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되었다

 

 

 

 

17 鄭彦珪 延日 瑩叔 10/ 10 瑄

정언규(鄭彦珪) 1515(중종 10)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형숙(瑩叔)

경산 현령. 삭령현감을 지냈다.

아들 정섭은 묵재 이문건의 손서로 부인 이숙희는 유명한 여류 시인이다.

 

 

18 睦詹 泗川 思可 10/ 19 世枰

목첨(睦詹) 1515(중종 10)∼1593(선조 26).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가(思可), 호는 시우당(時雨堂) 또는 두일당(逗日堂). 철성(哲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조참의 희안(希顔)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세칭(世稱)이며, 어머니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조격(趙激)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시독관(侍讀官)·보덕(輔德)·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관리들의 문란해진 기강을 확립할 것을 역설하였고, 흉년에는 금주령을 내려 곡식을 절약할 것을 강조하였다.

1558년 사간에 이어 1565년 공조참의를 거쳐,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를 역임하였는데, 이때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하였다가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에 기용되고, 이조참판·부호군 등을 거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이조참판·도승지·좌윤·우윤을 거쳐, 1591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그 지휘를 우성전(禹性傳)에게 맡기고 자신은 선릉(宣陵)·정릉(靖陵)을 보살피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아들 서흠 장흠등이 모두 현달했다.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신도비 명을 지었다.

 

 

 

19 金忠甲 安東 恕初 11/ 23 錫

김충갑(金忠甲) 1515년(중종 10)∼미상.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초(起初), 서초(恕初), 호는 귀봉(龜峰).

증조부는 김수형(金壽亨)이고 조부는 김언묵(金彦默)이며 부친은 김석(金錫)이다. 외조부는 기형(奇逈)이며 김신동(金神童)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김시회(金時晦)가 있다. 1543년(중종 38)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34위로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에 병과(丙科)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종 조에 헌납(獻納)으로 보우(普雨)를 죽이기를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 또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벼슬을 빼앗겼다. 저서로 『월곶첨사(月串僉事))』이 있다.

 

 

 

 

20 鄭惟吉 東萊 吉元 11/ 30 希湜

정유길(鄭惟吉) 1515(중종 10)∼1588(선조 21).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난종(蘭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광필(光弼)이고, 아버지는 강화부사 복겸(福謙)이다. 어머니는 이수영(李壽永)의 딸이다.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창연(昌衍)은 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 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 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했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서예에도 능해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 韓琦碑>가 있고, 저서로 ≪임당유고 林塘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