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당/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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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공 비각과 묘
전서공 비각과 묘 사진 전서공은 풍산류씨 제7세로서, 조선조 초에 가선대부 공조전서의 벼슬을 잠시 하다가 고향인 풍산에서 은거 중 그 곳이 자손만대가 살아갈 삶터로 적합하지 않으므로 명당을 찾다가 이곳 하회를 발견하고 관찰한 끝에 허씨와 안씨의 삶터를 피하여 숲과 늪을 개척하여 자손의 삶터를 마련하였으므로 그 은덕을 기려서 자손들이 세운 비(碑)이다. 묘소는 원래 풍산에 있었으나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화산중턱의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모셔졌다.
정려각
정려각 사진충신ㆍ효자ㆍ열녀를 표창하여 세운 비(碑)를 정려비라 하며, 하회마을로 들어오는 큰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도로의 동측에「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과 서측에「풍산김씨정려각」이 있다. 「정부인영양남씨정려각」에는 정부인영양남씨(貞夫人英陽南氏)와 공인문소김씨(恭人聞韶金氏)의 정려비가 함께 있다. 정부인 영양남씨는 남편 류공권(柳公權)공이 명나라 사신의 서장관으로 갔다가 별세하게되자, 자녀들을 교육시켜 결혼시킨 후 남편의 뒤를 따르려 식사를 하지않고 순사(殉死)하였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 갑진년에 정표(旌表)의 명이 내려져 정려각과 비(碑)를 일직면 석현리에 세웠다.

공인문소김씨는 영양남씨의 손부이며, 일찍 남편(류성룡柳成龜)이 죽게되자 그 시신을 집으로 모시기 위해 낙동강을 건너던 중 사공이 삿대마저 잃는 강풍을 만나자, 김씨는 시신을 안고 함께 순사를 결심하니 마침내 순풍이 불어와 무사히 도강하였으며, 사람들은 이를 하늘이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장례 후 순사하려 함이 주위의 만류로 무산되자, 몸과 마음의 병이 들어 위독한 중에도 남편 곁으로 가려는 마음에서 웃는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표의 명에 의하여 정려비를 조비(祖비)의 정려각 내에 함께 세웠다.

한 가문에서 한 분의 순사도 흔치 않은데 정부인영양남씨와 공인문소김씨가 나란히 열녀가 되었으며,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외지에서 비각훼손이 심하여 1989년에 석현리에서 하회마을로 정부인의 정려각 및 비와 함께 공인 정려비를 하회로 옮겼다.
순사란 나라 또는 왕이나 남편을 따라 죽는 것으로서, 남편이 죽은 여인을 미망인(未亡人)이라 하는 것도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명칭이다.